마르게리타, 티치아노 그리고 피비아 봄이면 티치아노Tiziano 가 어디선가 마르게리타(데이지) 꽃을 꺾어다 주곤 했습니다.날이 따뜻해지면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양지바른 풀밭에 누워 낮잠 자기를 취미 삼았던 그가 들판에서 꽃을 발견했던 모양입니다.생수를 하나 사서 마시고 물을 채워 마르게리타를 꽂아 놓고, 제가 발견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빈 생수병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마르게리타는 제 작업대에 잘 어우러졌습니다. 티치아노는 가죽을 자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재단사였습니다. 오랜 경력을 가진 그는 단단한 몸과 두툼하고 힘센 손으로 무거운 가죽을 가볍고 쉽게 다뤘습니다. 동료들은 유쾌한 그를 티치라고 줄여 불렀습니다. 그는 낭만과 멋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군에서 의무 복무를 할 때,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병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왠지 그럴 법 했습니다. 이탈리아라면 군인들도 아침을 에스프레소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았고, 티치라면 그 일이 잘 어울렸을 것 같아서입니다. 60이 다된 나이에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그가 어느날은 롤렉스 시계를 차고 와서 제게 손목을 내밀었습니다. "vale la pena. "그가 말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40년을 일했는데 이런 시계 하나 정도는 가져도 괜찮은 것 아니야?"티치는 시계와 훌륭히 어울리는 멋진 미소를 지었습니다. 어느날, 40년전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일할때라며 낡은 사진을 내밀었습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토즈, 프로엔자 슐러 등 여러 럭셔리 브랜드에서 일했던 그는 커리어의 마지막을 저와 함께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날, 그는 "안녕, 나는 티치아노야. 나는 sordo야." 라고 말했습니다. sórdo 1.형용사 귀머거리의, 들리지 않는.2.형용사 음향효과가 나쁜, 음향이 좋지 않은, 둔한 소리의.3.남성형 명사 [f. sórda] 귀머거리, 농아.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 이태리어-한국어사전 저는 sordo가 무엇을 뜻하는 지 몰랐고, 한참 일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가죽 자르는 기계의 큰 소음에 시달린 탓에 청각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잘 못해서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라고 고민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그의 생일에 축하 글귀를 적어 넣어 선물했던 작은 칠판에, 티치아노는 "non sento(안들림)" 라고 장난스레 적어 - 소음 때문에 만들어 놓은 작은 - 재단용 방 앞에 걸어 두었습니다. 처음 오는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라고 했지만, 상사였던 마우리치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할겁니다. 하지만 그는 제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동료였고 좋은 친구였습니다. 위트 있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꽃 사랑이 지극해서, 여성의 날에 즈음해서는 미모사를 꺾어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마르게리타 한 송이만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마키니스트의 로고를 고민하던 2021년 한국의 봄, 마르게리타 꽃을 닮은 형상을 떠올린 것은 티치아노의 덕이었습니다.따뜻한 봄이면, 티치아노가, 그가 꺽어 주곤 했던 마르게리타가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출시한 마키니스트의 피비아 버킷백과 호보백에는 군데군데 마르게리타를 닮은 로고를 배치해두었습니다.너무 도드라지지는 않게 은은한 존재감을 나타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봄이면 더 잘 어울리겠죠? 마르게리타의 꽃 말은 겸손한 아름다움입니다.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Grazie, Tizi. 한편, 그는 정시 퇴근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티치는 제가 일하던 마지막 날, 퇴근 전 환송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도 5시가 되자 미련없이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제가 살던 집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사진을 보내옵니다. 아무래도 올 봄에는 동료들을 보러,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피렌체에 다녀와야겠습니다.